자본과 정치, ‘공’을 이용하다

게시 날짜: 2010/06/24, 카테고리: Thinking

또다시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 월드컵이 열린다. 이번에도 ‘태극전사’의 선전이 ‘전 국민적으로’ 기원되고 있다 한다. 독점 대기업의 월드컵 애국 마케팅도 이미 시작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은 우리의 ‘애국심’과 정체성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천안함 사건의 향배와 복잡한 함수관계가 있을 듯하다. 
한국에서 스포츠 민족주의는 ‘끝나지 않는 신드롬’으로 이어진다. 물론 세계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축구 최강국 브라질이 2016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하자, 좌파 운동가 출신이며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대통령 룰라는 “올림픽 유치는 브라질과 1억9000만 브라질 국민, 남미의 승리다”라고 말했다. 룰라의 이런 말은 박정희·전두환 장군의 그것과 표면상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급격하게 국력이 커지고 있다는 브라질도 아마 올림픽 같은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가 필요한 모양이다. 한국이나 브라질보다는 훨씬 이성적인(?) 사회 구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캐나다나 일본에서도, 스포츠는 여전히 민족과 국가의 ‘힘’을 상징한다.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 이후 일본에서 ‘한국 따라 배우기’가 화두가 됐다는 믿기 어려운 뉴스도 있었다.

김연아는 새로운 ‘글로벌 자수성가형’ 인간

민족과 국가는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군사·경제 질서의 단위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공동체에 관한 환상과 신화를 생산하고, 거기 지질한 ‘애국’ 감정 같은 것을 덧붙이도록 한다. 스포츠는 가장 좋은 매개이다. 한국 스포츠의 현주소를 가장 화려하고도 명징하게 상징하는 존재는 김연아가 아닌가 싶다. 지난 동계올림픽 때 한국인이면 누구나 김연아라는 이 새로운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상징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을 것이다. 6조원에 이르는 ‘경제 유발 효과’를 가졌다는 김연아는 여러모로 보통 스포츠 스타와는 다른 존재이다. 또 그는 오늘날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가치인 루키즘(외모지상주의)의 수혜자이기도 하여, 뛰어난 업적을 이룬 장미란·신지애 같은 다른 여성 스포츠 스타와도 차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 김연아도 과거의 ‘국대(국가대표)’ 영웅들이 그랬듯, 올림픽 시상대 위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그 눈물의 성분은 과거 스포츠 스타들의 그것과 좀 달랐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 눈물은 가난한 나라 대표의 ‘애국 애족심’ 때문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앞만 보며 달리며 고통받아온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 ‘국민 여동생’을 보면서 (괜히) 눈물을 흘린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연아는 글로벌 생존 경쟁과 성공 경쟁의 전장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자식·가족을 둔 한국인의 좋은 ‘동일시’ 대상이었다. 혹여 밴쿠버 시상대의 태극기와 애국가가 김연아와 우리 가슴속에 있는 쾨쾨한 ‘애국애족’심을 부추겼다 해도, 그것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버전의 민족주의·애국주의다.

그런데 얼마 전 김연아 자신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자신을 대표 상품으로 한 스포츠 마케팅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다. 오늘날 가장 궁극적인 성공은 자본주의의 승리자가 되는 일이다. 단지 경쟁에서 ‘루저’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월등하게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김연아는 ‘미디어 스포츠(미디어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스포츠 문화)’의 화신 이상이다. 그는 스포츠를 매개로 한국 사회와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황홀하게 조우하는 어떤 ‘누빔점’이다. 마치 한국 재벌기업과 그들의 소유주가 그렇듯, ‘대한민국 스포츠’가 김연아를 키웠지만 그는 그것을 훨씬 넘었다. 김연아는 새로운 글로벌 자수성가형 인간이자 21세기형 ‘발전’의 상징이다. 

이러할진대, 월드컵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를 가장 직접적이고 ‘떼거리’처럼 상기시키는, 세상의 스포츠 이벤트 중에서도 가장 상업적이고도 정치적인 대회다. 2002 한·일월드컵은 한국 축구 문화의 거의 모든 것을 바꿨다. 축구 팬층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두꺼워졌고, 축구 보는 눈도 엄청나게 높아져 이제 ‘전문가’를 능가하는 남녀 마니아가 수없이 많다. 한국 축구 문화 변화의 핵심도 ‘세계화’하는 것 같다. 박지성을 비롯한 2002년의 주역들이 유럽으로 진출한 이래 벌써 빅리그를 밟은 한국 선수가 몇 명인가? 유럽 빅리그에서는 축구에서의 초국가적 자본주의 질서가 완벽히 관철된다. 국적도 인종도 없고, 오로지 성적과 몸값 그리고 글로벌 마케팅이 진리다. 유명 팀들은 유럽을 넘어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에 팬덤을 갖고 있다. 한국도 유럽이 주도하는 초국가적 축구 소비시장의 하나가 되었기에 맨유·리버풀·바르셀로나·첼시 같은 팀들의 팬이 상당히 많다.

ⓒAP Photo김연아(위)는 자본주의가 만드는 ‘스포츠 문화’의 화신 이상이다.

ⓒ시사IN 포토 2002 한·일 월드컵(위)은 한국 축구 문화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국가대항전과 국가대표팀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월드컵 같은 국가대항전이 왜 따로 필요하고 국가대표는 무슨 의미일까? 이제 ‘한국 축구 팬=국가대표 응원단’이던 가난한 시절은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미친 자본주의가 국경을 넘나드는 힘과 속도가 클수록 오히려 국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중국·일본 틈에 끼인 자칭 ‘약소국’이라 그런 국가대항전에서 한풀이가 필요한가? 그런 국가대항전이 가상의 전쟁이라 거기에서의 승리가 일종의 자위행위처럼 필요한 것인가?
더구나 극우의 전쟁 의지와 보복 결의가 난무하는 천안함 사건의 뒤끝이다. 북한도 44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한다. 북한이 그렇듯, 북한 대표팀도 세계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 팀은 출전 32개국 중에서 가장 두꺼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일종의 ‘이색 팀’이 아닌가? 우리도 정대세·안영학 외에 별로 아는 게 없다. 얄궂게도 핏줄 자체가 우리의 ‘형제’인 북한은, 세계의 졸부이지만 마음은 무척 가난한 대한민국의 뒷모습 그 자체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적’이다.

ⓒ뉴시스 이제 북한팀(위)을 응원하는 일도 ‘좌빨’이 되는 게 아닐까?

남북한이 같이 출전한 과거의 어느 국제 대회에서처럼 경기 진행요원이 인공기와 태극기를 혼동했던 일이 떠오른다. 과연 남아공 사람들은, 북한과 경기를 해야 하는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은, 텔레비전으로 월드컵을 시청하는 세계인들은 남북한을 잘 구분할까? 북한은 최빈국이어서 미국이나 한국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운 나라인데, 이 정권 들어 그 위상이 급격히 격상(?)되었다. 후진국스러운 긴장과 남북 대결을 너무나 그리워하는 변태적인 극우 세력과 정권은 북한을 우리와 힘이 대등한 집단인 것처럼 만들어주었다.

혹여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지면 정대세를 응원하는 일도  ‘좌빨’이 되는 게 아닐까? 북한이 혹 ‘Again 1966’하여 16강에라도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월드컵은 어디까지 그 정치적 촉수를 뻗어 우리의 국가 정체성 의식을 새로운 것으로 만들까? 둥근 공의 마술이 기대된다.

출처 및 원본 :  시사IN Live / 천정환(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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